미국 비행기 산업을 만든, Glenn H. Curtiss
미국의 자국 역사 미화 과정에서 가장 부풀려진 인물이 라이트 형제 (Wright Brothers)가 아닐까 한다. 어찌 됐건, 기록에 따르면, 최초의 동력식 비행기를 만든 것은 그들이 맞다. 하지만 비행기로 돈을 번 사람은 누굴까? 적어도 라이트 형제는 아닌 것 같다.
1903년 12월, 라이트 형제의 플라이어(Flyer) 1호는 12초간 약 37미터를 비행하는 데 성공한다. 이전까지 여러 비행체가 있었지만, 글라이더나 열기구에 선풍기 같은 동력기를 장착하는 수준이었다. 그들의 업적은 지금의 항공기와 유사한 공기역학적 상승, 하강, 좌우회전 조절이 가능한 날개구조, 이를 제어할 수 있는 스틱형 3차원 컨트롤러 그리고 비행기용 모터 추진기라고 한다.
첫번째 비행 성공 후 약 5년이 지난 1908년 8월, 라이트 형제는 미국 국방부를 상대로 비행 시연을 하였다. 하지만, 미국군에게 큰 인상을 준 것 같지는 않다. 몇 대의 훈련용 시제기 생산 계약을 따냈다는 기록이 있지만, 그 뒤에 대량 공급 계약으로 이어졌다는 이야기는 없다.
그로부터 불과 6년이 지난, 1914년 7월, 제 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고, 지구상에 공중전이라는 전쟁방법이 최초로 등장했던 시기, 하늘을 날고 있던 전투기는 라이트 형제의 플라이어가 아닌, 미국 Curtiss 사의 JN-4 와 독일 Fokker 사의 Dr.1 이었다. (독일 Fokker 는 1912년, 네덜란드인 Anthony Fokker 가 독일 유학 중 설립)
이 글의 주인공, 글렌 커티스(Glenn H. Curtiss)는 1878년 5월, 미국 동부에 있는 뉴욕주 서쪽, 해몬즈포트 (Hammondsport) 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당시 가장 많이 사용되었던 교통수단인, 마차의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기계공이었는데, 커티스가 4살 때 사망한다. 홀어머니와 할머니 밑에서 자란 어린 커티스는 학교는 중학교 정도만 다니고, 10대 중반에 지금의 Kodak, 당시 회사명으로는 'Eastman Dry Plate and Film Company' 에 들어가 카메라 필름 생산용 기계장치를 만들었다고 한다. 참고로 커티스가 Kodak 에서 근무하던 1890년대 중후반은 세계 영화산업의 태동기로, 미국에서는 무성영화가 막 세상에 등장하던 시기다.
※ 1890년대 한반도에서는 청일전쟁이 발발하였고, 일본군에게 민비가 살해된 을미사변이 있었다. 사회가 극도로 혼란했던 시절.
이 당시 미국은 영화산업 뿐만 아니라, 더 큰 산업이 번창하고 있었는데, 바로 현대식 자전거였다. 1890년대 후반부터 1900년대 초반까지 약 10여 년간 저렴한 현대식 자전거가 대유행하던, 이른바 자전거 시대 (Bicycle Craze) 에, 커티스는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1898년 (당시 20살), 결혼과 함께 자신의 고향인 해몬즈포트에서 자전거 수리점을 창업한다.
자전거 수리점은 번창했다고 한다. 그는 헤라클레스(The Hercules) 라는 자체 자전거 브랜드까지 만들어 판매를 시작했고, 뉴욕주 배스(Bath)에 회사를 하나 더 세우기도 한다. 그러던 중, 와이프의 삼촌과 함께 모터사이클 제작을 시작하게 된다. 1907년 1월, 그가 29세가 되던 해에는 모터사이클 헤라클레스가 최대 시속 220km 를 달리는 데 성공하면서, 기네스북에 오르기도 한다.
이 무렵 커티스의 가볍고 소형이면서도 힘이 좋은 모터사이클 엔진을 눈여겨본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전화기 발명가,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 (Alexander Graham Bell) 이었다. 당시에 이미 60세였던, 그는 미국 최대 전화 회사 소유주로서 막대한 부를 누리고 있었지만, 멀리 있는 곳의 사람과 소리로 대화만 할 수 있는 전화기를 넘어, 직접 만날 수 있게 해주는 항공기에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 1906년 1월 자동차 전시회에서 커티스가 출품한 소형 엔진을 보게 되었고, 자신의 글라이더에 장착할 엔진 하나를 주문한다.
※ 현재 미국 최대 통신회사, AT&T 의 전신이 그레이엄 벨이 창업한 Bell Telephone Company.
그레이엄 벨은 당시 비행체 실험 협회 (AEA: Aerial Experiment Association) 를 개인 경비로 설립한 후, 전국에서 유능한 관련 엔지니어들을 회원으로 모으고 있었는데, 글렌 커티스도 스카우트되었다. 커티스는 그때까지 풍선형 비행체에 사용되는 경량 엔진 4대를 납품해 본 경험이 전부였고, 돈 안 되는 비행기 자체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
그랬던, 커티스가 AEA 에 합류한 지 1년 만인 1908년 7월, 회원들의 도움을 받아 처음 제작한 비행체 June Bug 가 여러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1,550m 를 비행하는 데 성공한다. 이를 계기로 그는 다음 해인 1909년, AEA 를 탈퇴하고, 항공기 제작업체 Curtiss Aeroplane & Motor Company 를 설립한다.
커티스는 그 뒤로 각종 새로운 비행체 경진대회에서 큰 상금을 받기도 하고, 200km 가 넘는 장거리 비행을 성공시키면서, 세간의 주목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그의 비행기가 돈을 벌어주지는 못했다. 오히려 벌어 놓은 돈을 까먹고 있었다. 당시는 비행기를 운전할 수 있는 사람도 없었으니 당연히 사는 사람도 없었다. 거기다가 그 와중에 특허소송을 당하게 되는데, 소송자는 바로 최초의 동력식 비행기 발명가, 라이트 형제였다. 소송은 그 뒤로도 수년간 계속되었고, 결국은 라이트 형제가 승소한다.
1910년 11월, 커티스는 자신의 회사에서 제작한 비행기로 미국 해군의 순양함 갑판 위를 날아올라 해안선을 따라 비행하는 데 성공하였고, 이를 계기로 이후 수십 년 동안 미국 해군에 전투기 납품과 비행사 교육 사업을 따내게 된다. 드디어 비행기로 돈을 벌 수 있게 된 것이다. 당시 커티스가 미국 해군에 납품한 전투기는 1911년 7월부터 생산한 A-1 Triad 이다. 이 전투기는 미군의 요청에 의해 수십 번의 개량을 거쳐, 수륙양용 이착륙이 가능하도록 제작되었고, 전투기 파일럿을 양성하는 교육과정에도 사용되었다.
1912년, 커티스의 비행사 교육 프로그램에 참석한 교육생 중에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군의 주력 전투기를 독점 설계하고 생산했던, '나카지마 비행기 제작소'의 설립자 '나카지마 치쿠헤이(中島知久平)' 도 있었다고 한다. 당시 그는 일본 해군의 중위자격으로 비행기 조종사 자격증 획득을 위해 미국에 파견된 일본 군인 3명 중 1명이었다.
일본의 나카지마 비행기 제작소(中島飛行機製作所)는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7년 5월, 도쿄의 북서부 내륙에 있는 군마현에 설립된 일본 최초의 비행기 설계 전문 회사였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군이 사용한 대부분의 전투기가 이 회사에서 설계되었고, 제작은 미쓰비시 중공업 등이 담당하였다. 기록에 따르면,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카지마 비행기 제작소가 일본군에게 납품한 전투기 수가 약 3만 대에 달한다고 한다.
※ 일본의 스바루 자동차의 로고에는 별 5개가 그려져 있는데, 왼쪽 위 가장 큰 별이 나카지마 비행기 제작소가 종전 후, 이미지 세탁을 위해 개명한 후지공업(富士工業)이고, 나머지 별 4개가 합자회사. 나카지마 비행기 제작소의 잔영은 현재까지도 스바루 자동차에 남아있음.
1914년 1월,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면서, 커티스의 회사는 엄청난 속도로 성장한다. 전쟁 초기부터 깊이 관여한 영국에서, 대량의 전투기 주문이 들어 온 덕분이다. 이 무렵 제작된 것이 대형 수상 전투기, H-12 LA (Large America). 섬나라 영국에서 활용할 수 있도록 해상에서 이착륙이 가능했고, 275마력 엔진을 탑재하여, 장거리 해상 감시와, 해상 인명구조, 긴급 물자수송 등에 사용되었다고 한다. 영국 해군의 기록에 따르면, 주문대수가 100대 이상이었다고 한다. 비용보다 전쟁에 이기느냐 지느냐가 더 중요하던 시절이다.
1918년 11월, 전 세계와 홀로 싸우던 독일이 결국 항복했고, 전쟁은 끝났다. 커티스 회사는 어찌됐을까? 당시 전쟁 특별 수요를 누리고 급성장한 대부분의 회사처럼, 커티스 회사도 2년을 버티지 못하고 사실상 망했다. 1920년 중순, 당시 42세였던 커티스는 회사 지분을 처분하고 회사를 떠나 플로리다 마이애미에 정착한다. 커티스가 떠난 회사는 여러 투자기관이 비슷한 처지의 항공기 관련 업체를 합병하여, 현재도 남아 있는 Curtiss-Wright Corporation 이 되었다.
1930년 7월, 커티스는 여행 중, 급성 맹장염으로 갑자기 사망한다. 그의 나이 겨우 52세. 지금 기준으로는 한창나이지만, 당시 미국 남성 평균 수명은 50대 후반정도였다고 한다. 그의 무덤은 태어난 고향 해몬즈포트에 있으며, 근처에 작은 규모의 Glenn H. Curtiss Museum 이 있다.
※ 유럽쪽 항공기 역사자료에서는 미국 Glenn H. Curtiss 에 대해 그다지 높게 평가하지는 않는 것 같다. 동시대에 프랑스에서 개발된 Louis Bleriot 의 비행기는 현재 비행기 같은 모양의 날개만으로도 프랑스와 영국을 횡단한 비행 기록이 있고, 독일의 Fokker 전투기는 비행사가 기관총을 쏠 수 있는 동기화 장치까지 내장되어 있었다. 전투기라는 군사용 비행기 분야에 한정한다면, 커티스의 비행기보다 우수한 비행기가 유럽에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과거가 어떻든 현재 항공기와 우주선 분야는 미국이 가장 앞서 있다. Glenn H. Curtiss 는 그런 미국의 1세대 인물이다.
※ Curtiss JN-4 (Jenny) 훈련기의 원형에 가까운 실물 비행기 동영상 : https://youtu.be/DfOa_XpGDIY?si=00aa9hJnu0qgF79I